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사무엘하 12:4).
사무엘하 12장은 사무엘하 11장에서 벌어진 일, 곧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하시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나단은 다윗이 행한 일에 대하여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자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자의 모습으로 비유합니다(삼하 12:1-4).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윗은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소위 폭군이라 하는 자들은 약한 자의 것을 강제로 빼앗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힘으로 취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윗은 아마도 스스로가 폭군과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폭군들과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은 그런 류의 왕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윗은 나단이 말하는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폭군과 같은 그 부자에게 노하여 나단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이 죽을 자라"(5절)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전한 비유는 바로 다윗이 폭군과 같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가난한 자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은 물론 자신의 행동을 감추기 위해 선을 가장했고 그러한 위선은 결국 충성스런 신하를 죽이는 일까지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비유를 깨달은 후에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였다'(13절)고 고백합니다. 즉 그의 범죄는 그가 저지른 일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그러한 일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폭군들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다윗의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이 전쟁터에 있어야 할 때에 궁에 머물르며 영적으로 나태한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그러한 범죄에 노출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다윗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잠시 망각했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께서 왕으로 기름부은 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이나 이것은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말씀이지 다윗이 위대하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다윗은 한 인간으로서 언제든지 범죄할 수 있고 또 그 범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어떤 범죄든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해주셔서 정죄함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죄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24-25).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사망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언제나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범죄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복되는 죄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자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인식'이란 "죄를 짓지 말아야지" 또는 "죄를 해결해야지"와 같은 생각과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자신이 곤곤한 사람이라는 인식입니다. 자신이 죄를 안지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인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노력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어 또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거나, "내가 반복해서 짓는 죄를 내 의지로 멈추게 할 수 있어"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더 큰 좌절을 맛보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자신은 죄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흔하게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본분에 대해서 망각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나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는 범죄를 하나님 앞에서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구원의 기쁨은 힘을 잃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길지라도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실 유일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할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 인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매순간 믿고 경험하고 의지하고 사는 것이 정죄함이 없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의 고백에서 이어지는 로마서 8장의 첫 구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지만 죄로 부터 자유로운 것은 예수께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회개할 일이 없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자라면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믿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믿는다면 구원의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 51:12). 구원의 기쁨이 넘칠수록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골 3:1-2). 이것이 성령께서 그 안에 계셔서 일하시는 증거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거듭난 자의 몸의 행실을 죽이시고(롬 8:13)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만드십니다(벧후 1:4)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나, 합당한 열매가 없는 회개나,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믿는 것이나, 회개를 안하고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나, 노력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 같은 것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는 다윗의 고백은 설사 죄에 대해 괴로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그 죄를 해결하려는 방법이 자기의 지혜나 의지나 감정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 범죄함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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