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은 교회가 성장되고 있는 모습을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먼저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라는 표현으로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한다. 또한 '말씀이 왕성(흥왕)하여졌다'는 말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설명한다.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로 흩어지고 있는 모습도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드러나고 전파되며, 그것이 종족과 지경을 넘어 확산되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적이라는 것은 교회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기 위해 부름받았고 또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세우신 교회는 성장하고 확산된다. 공동체의 규모나 유명세나 업적과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의 성장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요15:5).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성장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자라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의 성장을 어떤 측정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접근하므로 문제가 생겼다. 세상의 잣대로 교회의 성장을 평가하려는 시도가 올바른 교회 성장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나 북미 사회의 상황만을 가지고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 하기가 어렵다. 외형적 성장에도 '성장'이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교회 성장의 모든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가 자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교회가 확장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가? 그것은 교회에 대한 '이 세상의 반응'을 통해서 이다. 교회의 확장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것이 된다.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에 대해 거세게 저항한다(요15:18-25). 이러한 세상의 반응은 표면적으로는 물리적인 것이지만 실제는 영적인 것이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엡 6:12)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은 교회에 대한 미움과 공격으로 나타난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는 교회에 대한 공격이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교회에 대한 공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타협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공산주의나 특정 종교의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 교회에 대한 핍박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또한 문화적이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적다. 반면에 종교적인 자유가 보장된 것같은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핍박을 받지 않으면서도 종교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에 대해 세상과 타협하게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실제로 안전지대에 있다고 여겨지는 많은 지역 교회들이 이런 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 사회가 인정하는 선한 일들을 함으로서, 또는 그 사회에서 보호받고 인정받음으로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교회는 진리에 생명을 걸므로 성장한다. 물론 이것이 물리적인 투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을 숭배하는 세상이 진리를 따라가는 교회를 편안히 놓아두지 않을 때 이것은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반대로 타협을 통해 편안함을 추구하고 규모가 커지는 것은 교회가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세속화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박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진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길바닥에 버리워지는 때에 진리를 수호하고 전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초대교회의 시작과 성장과 확장을 생각할 때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과정이 모두 세상의 거센 박해 가운데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같이 물리적 박해를 받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그러한 교회들로부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기도하므로 함께 박해를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다.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보다도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박해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예루살렘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안디옥 교회는 번성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한국이나 북미의 교회들은 풍요로움 가운데 있지만 또한 동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결코 잊지 않았듯이 우리도 서로를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몸된 교회는 각 지체의 아픔을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더불어 박해라는 것이 물리적 억압만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교회를 방종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지나친 풍요와 자유 속에서 진정한 풍요와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박해의 목적이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라면, 물리적인 억압보다 교회를 방종케하는 것이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박해에 대하여 경계해야 한다. 물리적 박해가 없을지라도 교회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박해받는 교회들의 신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이다. 신앙을 지키는데 있어서 모든 교회가 그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미 나태해져있는 신앙은 그렇지 못하다. 삶 가운데 신앙의 능력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래 전에 목격한 중국의 한 지하교회의 예배는 악기도 없고 성경도 없이 그저 암기한 말씀을 소리내지 않고 읽고 입만 벙긋하여 찬양을 드리는 예배였지만 성령의 강한 임재와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 예배에는 성령과 말씀이 충만하였고 자유로운 예배였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예배함으로 다른 어떤 것들도 마음을 빼앗지 못하는 그런 자유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첨단 건물과 시설이 있어야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야하고, 음향시설이 있어야 찬양을 하고, 프로젝트가 없으면 예배를 진행할 수 없는, 이 사람 저 사람에 신경써야 하고, 서로 비교하고, 눈치보고, 통제해야 하는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예배가 가능할까? 삶과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회에 대한 박해에 있어서 분별의 문제도 중요하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이나, 로마 카톨릭이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한 것과 같이 이 시대에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러 이유로 인해 진리를 핍박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의 모양을 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려는 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이는 겉모양은 기독교이고 교회이지만 속에는 기독교성이 없는 기독교의 문제이다. 진리에서 멀어진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왜곡된 기독교를 보고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반기독교에 대한 감정은 많은 부분 이런 오해로 인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교회의 모습으로 인해 정작 진리 위에 서 있는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된다. 그리고 거짓 기독교가 교회를 대변하게 될 때에 그 핍박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력들을 분별해야 하고, 자칫 진리를 핍박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박해'라는 것은 어디에나 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만이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며 모든 종교가 박해를 받았고, 또 다른 종교를 박해했다. 정치적 신념과 체제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박해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박해한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불의한 방법으로 지키려는 어느 곳에서나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있다. 기독교 또한 다른 종교들을 박해했던 역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또한 그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 힘과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도 힘을 가져야만이 박해를 받지 않고 더 나아가 다른 종교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고, 또 사회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약한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로마 사회의 약자였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적 혁명을 일으켜 체제를 뒤집을 수도 있을 만한 세력이 될 수도 있었고, 또 그러한 가능성으로 인해 박해도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약자로 남아 있었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질수록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갔다. 이렇듯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박해를 받는 교회이다. 초대교회는 박해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박해를 피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졌고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세상에는 많은 박해가 존재하지만, 스스로 약함을 택하여 박해를 받는 것으로 박해를 이기려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들 뿐이다.
초대교회에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그치게 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더욱 박해가 심해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는 더 큰 환란을 통과할 수 있는 더 큰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박해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깨어서 기도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실적인 유익이나 성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다. 그러므로 이 박해의 시대에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기 원한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벧전 3:12)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구약 시편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사도들의 죽음과 악인의 죽음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아주 다른 것 것이다. 의인의 삶이 고달퍼 보이고 그의 죽음이 처참해 보이지만 그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그로 인해 인류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교회는 십자가를 통하여 진리를 나타내므로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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