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 공산권이나 이슬람 지역의 지역 교회에 방문했던 적이 있다. 알려진 바대로 공산권이나 이슬람 국가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곳에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공동체를 지하교회라고 부른다. 개인적으로 이 명칭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인하여 교회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생각했다. 성도의 모임도 주로 지하나 동굴과 같은 비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이미지이고, 또 실제로 여행중에 그런 모임에 참석해 본적도 있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 중국의 한 대표적인 지하교회를 방문한 후에 내가 가졌던 지하교회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그 지하교회는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했다. 교회의 건물도 지상으로 4층이나 되는 규모였다. 교회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들은 정부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로 교회의 담임목사는 정기적으로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 담임 목사는 칠십이 넘은 나이였는데, 한 번에 4년 정도의 수감 생활을 이미 여러번 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오히려 교회가 더 부흥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노 목사는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말하기를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성도들이 더 기도하고 더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 믿는 사람들의 수가 자신이 교회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난다"고 했다.
지하교회란 단지 숨어서 예배를 드리거나 위태로운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아 지하교회가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지하교회가 핍박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것이 옳은 관점이다. 즉 교회에 대한 박해는 참 신앙을 가진 자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 박해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지하교회이다. 이러한 지하교회는 외부적인 박해나 공격에 대하여 세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지하교회는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세상의 공격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마서 6장)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박해에 대하여 세상에 속한 기관들처럼 대처하지 않는다. 즉 어떻게 재산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멤버십을 계속 유지하게 할 것인가, 권리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어떻게 내 생활을 보호하고 지킬 것인가 등의 반응을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자유 세계의 교회들은 위협에 대해 세상의 방식으로 맞서 싸우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법과 제도로 보호받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교회는 종교의 자유가 없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교회이다.
지하교회는 위협에 대해 참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 교회에 대한 눈에 보이는 위협이 없을 때에는 참 교회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면 참 교회가 드러난다. 박해와 제자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으로 인해 받는 고난은 싸워서 피해야 할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위협받지 않는 때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교회는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들도 미움을 받을 것"(요 15:18)을 기대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미움에 대한 참된 교회의 반응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순교자의 소리의 에릭 폴리 목사의 글을 소개함으로 지하교회가 무엇인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훈련, 고난을 감수하는 사랑의 신학이 지하교회의 특징이다. 지하교회는 하나의 사랑만 지닌 교회로 그 사랑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다. 지하교회는 이미 죽었으므로 자신을 방어하거나 보호하려 애쓰지 않는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주님을 섬긴다. 지하교회는 오직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데만 집중하고, 지하교회의 맡겨진 신학적 유산, 곧 자신의 '소망'을 잘 관리하여 무엇하나 더하거나 빠트리지 않는다. 지하교회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는 주님의 경고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반대에 부닥쳐도 놀라지 않는다. 지하교회는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주님의 위로를 마음에 새기고 있으므로 두려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하교회는 검을 내려놓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지키기 때문에 재판, 대중 매체, , 정치 같은 세상의 '검'을 잡지 않는다. 대신 오직 어린양의 피와 어린양이 증언하는 말씀으로만 무장한다. 욕을 먹어도 욕하지 않고, 저주 받아도 저주하지 않으며, 핍박당해도 축복하고, 살해당해도 용서한다. 세상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자신을 세상에 맡기지 않는다. 지하교회는 숨지 않는다. 지하교회는 세상의 반대를 온전히 의식한 상태에서 사역을 펼치고 그에 맞추어 전략을 짠다. 지하교회는 항상 섬기고, 원수까지 섬기는데 주님을 섬기듯 섬긴다. 즉, 세상처럼 되어서 세상을 섬긴다는 말이 아니다. 지하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대가를 기쁘게 치르며, 주님 이름을 위해 고난당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여긴다.... 지하교회는 믿음을 변호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다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죽음은 피의 순교로 한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세상과 자아에 대하여 죽으면서 매일 일어날 수도 있다. 지하교회는 후자 역시 순교로서 존경하도록 가르침 받아왔다." ('지하교회를 준비하라'중에서, 에릭 폴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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