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을 기념하는 계절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짐승의 구유에 누이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누우신 곳은 결코 낮은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낮은 곳, 천한 곳으로 보였던 그곳은 실제로는 높은 곳이고, 귀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부터 죽으심 까지의 모든 여정이 세상이 보기에는 낮고 천하고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십자가는 사람들이 볼 때 가장 낮고 천하고 실패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왕이시며 주인이시므로, 따라서 그 분이 가신 곳이 곧 높은 곳이요 귀한 곳이요 승리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셨던 가장 귀한 장소이고 가장 큰 승리의 장소입니다. 예수께서 겸손하시다는 것은 그가 계셨던 곳이 낮고 천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낮고 천하게 보는 인간들을 그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계셨을 때, 그 좌우에는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곧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하는 형벌에 대하여 두 가지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있는 강도와 같은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있는 강도와 같은 태도입니다. 좌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즉 자신이 고통 받는 이유가 자신의 죄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편 강도는 자신의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합니다. 그가 좌편 강도를 꾸짖으며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눅 23:40). 우편 강도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두 강도가 십자가에 달렸던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는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일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좌편 강도와 같이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고, 우편 강도와 같이 고통 중에도 예수님은 옳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편 강도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 이 말은 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가장 큰 고통 가운데 계실 때 주님을 위로하였던 자가 누구입니까? 인생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태도를 보였던 우편 강도입니다. 우편 강도의 십자가는 실패와 고통의 자리가 아닌 축복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나의 실패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면 그곳은 실패의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자리입니다. 나의 고통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면 그곳은 고통의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리입니다. 철저히 실패한 인생의 끝자리일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그 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인생의 고통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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