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생각대로 선교하려는 지역교회들을 향한 메시지
성경의 요나서를 읽으면서 첫 번째로 부딪히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왜 요나를 보내시는가?'이다. 이는 요나서의 핵심 주제가 바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요나에게 니느웨에 갈 것을 명하셨다는 내용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나의 생각과 자격에 상관없이 그를 보내시며, 요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니느웨에 도착하게 하신다. 또한 요나의 불성실한 임무 수행을 통해서도 니느웨를 회개하게 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요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선교에 부름을 받은 교회들이 바로 이러한 모습과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선교에 대한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선교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실 때 교회는 자기 자랑과 자기를 내세우기에 급급한 것이 아닐까? 한편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도리어 하나님께 화를 내는 요나의 모습과 같지는 않을까? 마치 본인들이 선교의 주관자인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늘날 지역 교회들도 선교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교 명령이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요나서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이 중요성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요나를 사용하시는 것일까? 왜 하나님은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내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내시는 목적이 먼저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 아닐까?
자기 생각대로 선교하려는 요나의 시도는 그를 태우고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요나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하는 것처럼(욘1:9), 교회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선언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이 많은 선교의 현장에서 보여 지는 교회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 과정이 없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선교에 대한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갇혀있던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 동안의 기도 중에 결국 요나가 깨달은 것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욘 2:9)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속해 있는 교회는 언제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요나에게 임하시므로 요나는 니느웨로 갔다. 하나님은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교회가 자신들이 가려는 길이 지극히 자기의 욕심과 생각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할 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교회가 잘 못 보낸 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전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자신의 일상과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을 위협하게 되고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제껏 순수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오염된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복음의 사명을 맡은 자들의 발걸음은 철저하게 성령을 따라가야 한다. 그들의 순종은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많은 사람들에게 저주가 될 수 있다. 잘 못 가고 있다면 속히 발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순종하여 니느웨로 간 요나이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요나는 자신의 사역을 사랑으로 하지 않고 의무적으로 한다. 한 사람 이라도 하나님의 경고를 못 들은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요나의 모습에서 한 영혼에 대한 긍휼이나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의무,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그 명령을 행하는 교만함이다. 요나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 화를 내는 것은 그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나타낸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가? 그것은 요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불편해질 자신의 마음을 위해 종교적 습관처럼 사역을 했던 것이다. 교회가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선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한 영혼에 대한 마음보다는 보이는 실적에 더 마음을 두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선교의 모든 열매들은 교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요나와 같이 불성실하게 복음을 전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선교 사역에 대한 평가는 그 실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 앞에 선 교회의 마음과 태도를 보고 계신다.
요나서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니느웨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요나가 드리는 기도이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욘 4:1~3)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니느웨보다는 요나에게 있었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누구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든지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근심거리였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싫다고도 말할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을 만큼 하나님과 가까운 요나가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다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하고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건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녀들을 보는 아픔을 느끼지 않으실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괴로워하는 일이 정말 있는 것일까? 탕자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아버지에게 도리어 화를 내는 형과 같은 요나를 아버지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신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일까? 하나님께서 뜨거운 태양 밑에 앉아 있는 요나에게 박 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하여 성경은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다'(욘4:6)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들을 기뻐하는데 몰두해 있다면 교회에게 베푸신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보낼 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모습의 교회는 자기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언제나 하나님께 화를 내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것을 깨달을 수 없을 만큼 목이 곧아진 교회의 모습이다(욘 4: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회들이 회개하고 깨어나기를 원하신다. 자신이 받는 복에만 집착하지 않고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붙들고 일어서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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