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이리 가운데 보냄 받은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역의 '표징'이 된다. 세상의 죄를 없이 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인 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한다. 그리스도인이 '양'인 것은 그가 속죄의 효력을 세상에 베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세상 속에서 계속 새롭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양의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이리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 희생의 산 증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의미에서 이리, 즉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인간이 되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합된 산제사를 매일 드려야 하는 것이다.’ - 자끄 엘룰(Jacques Ellul.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자끄 엘룰의 글을 읽으면서, 세상에서 이리와 같이 강함을 추구하고 약자를 지배하려는 사람들 속에 가장 약한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세상에 보내진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고 또한 그 분이 가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말씀이기도 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바로 이 길을 가는 것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이리와 같이 살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리 가운데 양과 같이 살라고 보냄을 받았다. 그리고 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리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오셨다. 모든 사람이 생존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곳이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가운데 '어린 양'으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이 부와 권력을 쥐고 있든지 아니면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받든지 모두 생존을 위해 이리떼와 같이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가난한 자들의 인권과 약자를 위한 혁명을 위해 오셨다는 것은 맞지 않다. 예수는 모든 이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리떼들 가운데 가장 약한 자인 어린 양이 되어 죽는 것이었다.
이리의 세상에서도 그들 간의 싸움에 밀려 짓밟히고 멸시 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도 역시 이리처럼 사는 인생들이나, 이리와 같은 삶의 방식에 치여 지치고 피곤해도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인생들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다. 더 이상 이리와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쉽고 가벼운 삶이었다(마 11:30).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압제하는 힘 있는 이리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지도자가 필요할 뿐이었고, 예수님을 그 지도자로 생각했다. 결국 예수가 힘 센 이리가 아닌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망하여 예수를 떠났다. 극히 소수만이 예수가 구원자임을 깨닫고 탐욕적인 이리의 삶을 버렸다. 힘 있는 이리들은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섰고, 힘없는 이리들은 예수를 배반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
교회가 보내진 세상은 예수께서 사신 세상과 같다. 이리떼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에서 양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인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러한 삶의 결과물은 무엇인가? 양의 능력으로는 결코 세상에서 이리를 피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다. 양이 오로지 목자를 따를 때만이 그 길이 안전한 것처럼 교회도 주님을 따를 때만이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목자를 따르는 삶의 방식이란 세상이 보기에는 아주 위험하고 불안정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의 삶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의 눈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전 1:18).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은 십자가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면 갈 수가 없다. 어떻게 가장 약한 자가 되어야 하는 그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극대화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한다(고전 1:24).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삶이다. 교회는 매일 매일의 삶에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부름을 받고 또 보내어 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가장 복되고 안전한 길이며, 형통의 길이고 안식의 길이다. 이리 떼 가운데서 양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이리떼처럼 살고자 하는 세상 속에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강함이 아닌 약함을 선택함으로, 힘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원리로,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삶이 아닌 영혼을 구원하는 삶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삶이다. 이렇듯 이미 교회의 길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길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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