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성도의 씨름은 생존이나 행복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즉 이 씨름은 구원에 대한 싸움이고, 따라서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가 싸우는 대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에서 저는 복음서에 기록된 두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첫 번째 떠오르는 것은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야 하는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삼십 팔년 동안이나 그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 싸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 못에 먼저 들어가 병이 나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의 씨름이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헛된 싸움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마치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와 같습니다. 그들은 구원과는 관계없는 문제들에 매몰되어 그 문제들만 해결될 날을 기다리며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씨름을 신앙생활이라고 부릅니다. 가끔씩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기적(?)을 보면서 자신들의 인생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그곳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혈과 육에 대한 씨름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실상 그들을 얽매고 짓누르고 가두고 있는 세력은 따로 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그 세력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성도의 싸움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짐들을 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히 12:1-2). 두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은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구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이 아니하니라"고 답하셨습니다(막 7:27). 여기에서 이 여인은 자신이 싸우는 대상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여자는 지금 자신이 이방인 여자로서 받는 사회적 멸시나 천대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귀신들린 자녀를 둔 수치심이나 주위의 시선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님도 알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자신이 개로 취급되어도 상관없는 중요한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느냐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께서 그 여인과 그 자녀를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고백은 '주님이 옳으시다는 것'과 자신과 딸이 개와 같을지라도 주께서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요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5:28). 우리가 씨름하는 상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하늘 보좌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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