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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관점의 전환

지난 2년여의 펜데믹 기간은 교회에게 큰 변화와 도전을 가져왔음이 분명하다. 예배당에 모여 주일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오래 지속됨으로 인하여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교회와 신앙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게 됐다. 대면 예배, 비대면 예배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고, 예배의 장소와 교회 건물의 의미에 대한 생각들도 넘쳐났다. 이 시기에 정부의 방역조치가 교회에 대한 통제를 의도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소위 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중 대다수가 더 이상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이제 다시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교회..

무덤에 계시는 동안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누가복음 23:55-56).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는데 그 분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십자가와 부활사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데 함께 온 여자들은 왜 위험한 길을 따르고 있을까? 그토록 사랑하고 믿었던 주님이 이제 목숨을 잃고 시신만 남았는데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그 분을 따르는가? 손을 내어 치료하시지도 않고 그 말씀을 들을 수도 없는데 여자들은 왜 무덤 앞에 있는가? 예수님은 살아계시며 따르는 자들의 주인이시다! 그곳이 무덤이든 풀뭇불이든 사자굴이든.

전쟁의 소문

전쟁의 소식이 들린다. 전쟁은 늘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전쟁의 소식이 늘어났다. 전쟁터를 실시간으로 보는 시대에 살고있는데, 정작 전쟁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오로지 소문들이 전쟁을 만든다. 듣리고 보이는 것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이토록 다른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버리고 헛된 것은 피흘려 지키려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도대체 누가 원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을 들을 것이라 하셨다. 이것은 단지 전쟁이 많아지는 것을 넘어 '전쟁의 소문이' 많아지는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 소문에 속고 또 속아서 결국 모든 인류가 스스로를 패망시킬 전쟁의 날까지 정신없이 달려가게 되는 그 시작을 인류는 이미 지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마지막 추수의 때가 가깝..

은퇴 이후의 삶

2021년을 끝으로 선교사로 파송한 소속 교회에서 사임을 했다. 육십세에 은퇴 목사가 되는 경우가 많지 않기에 주위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일찍 은퇴를 했냐고 묻는다. 흘러가는 시간과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몇 년 전부터 마음 속에 사역을 마무리할 생각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시절에 나는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방송국에 들어가서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는 일을 꿈꾸었다. 그러나 결국은 신문방송학과이 아닌 대세(?)를 쫓아 비즈니스를 공부하게 되었고 꿈은 잊어버려야 했다. 후에 내가 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했을까 돌아보니, 글을 쓰는 일뿐만이 아니라 세상 이곳 저곳을 다닐 수 있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인 것 같..

삶을 위협하는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늘 마주하던 세상이 갑자기 두려워 질 때가 있다.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거나 소통할 수 없다거나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삶이 물위에 떠있는 것과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나의 현재가 위태롭고 불안정하게 여겨질 때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한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태복음 14:27) 인생이란 자체가 "물 위를 걷는 일"과 같이 인간의 힘으로 살아낼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걸으셨고, 예수님이 허락하실때 베드로도 물위를 걸었다. 걷다가 빠져도 건져주셨고, 예수님과 함께 걸을 때에는 결코 물에 빠지지 않았다. 어느날 마치 불구가 된 것처럼 주저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에도 우리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세상..

'추수할 일꾼'의 비전

누가복음 10장 2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소위 “타문화 선교”(Cross-Cultural Ministries)라고 부르는 현장에 참여한지 삼십여 년이 되었다. 처음 십 년은 선교동원가로서, 그 다음 이십 년은 목사 선교사로서 지나 온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선교활동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된 1990년도에 한국에는 ‘해외여행 자유화’라는 큰 변화가 있었다. 그 후 십 년간 많은 여행을 했다. 기독교 신앙을 금지하는 나라들에서 기도했고, 성경을 구하기 힘든 지하교회의 성도들에게 성경을 전달하기도 했다. 90년대 말에 필리핀에 학교를 시작하게 되는 것을 계기로 단기 선교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교회의 단기 선교 여행..

관계의 때와 거리

나의 관계에 대해 돌아본다. 가족 말고는 오래 지속되는 좋은 관계가 별로 없음을 발견한다. 인간관계의 실패냐 성공이냐 하는 판단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의 관계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갖는다. 좋은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좋겠지만 좋았던 관계도 멀어질 수 있다. 만약, 억지로 좋은 관계를 만드려고 했다면 결국은 멀어지게 된다. 좋은 관계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닌 듯 하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인지 미숙함 때문인지, 관계가 멀어지면 모두 내 탓 같다. 그러나 누군가 이유가 있어 나를 멀리할 수도 있고, 나도 이유가 있어 누군가를 멀리할 수 있다. 인간은 약하고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 지혜로울 때가 있다. 좋은 관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관계의 거리도 하나..

광야를 그리워 하는 것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위의 말씀을 가사로 한 찬양을 신나게 불렀던 기억이 난다. 곡조와 리듬에 흥이 겨워 이 말씀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마냥 즐거워한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선지자의 기쁨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세상의 기준과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다.

행복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무엇때문에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 인해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행복하지 못할까 염려할 문제라는 것은 없으며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할 조건이라는 것도 없다. 행복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